《밤, 그림자, 시간》 


 《밤, 그림자, 시간》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낮 동안은 가장 긴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밤에는 어떤 그림자를 볼 수 있는가. 밤은 지구의 그림자가 지는 구간이며 모든 그림자를 그 안으로 포섭한다. 밤, 그림자, 시간이라는 세 단어는 아무런 수식어 없이 나열되고, 서로의 의미 에 영향을 미치며 공명한다. (밤, 시간, 그림자)가 되기도 하고 (그림자, 밤, 시간)이 되 기도 한다. 명확한 것은 세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회화 속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예란의 화면에는 흰 천을 뒤집어쓴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성별, 생김새와 같은 시각적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화면 속에 존재하고 프레임 밖의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한다. 작가는 이들을 NPC1*라 명명한다. NPC는 작가의 노동 경험에서 기인한 대 상이며, 여러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겪은 자아의 흐려짐이 투영되었다.

 노동의 경험은 전면적으로 화면 위에 배치된다. 대부분의 창작자가 그러하듯 작가는 여러 단기 노동을 하고 있다. 움직임이 제한된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나쳐 보 내는 경험은 어느 순간 자아가 투명해지는 기점에 다다른다. 작가는 이러한 경험에서 모든 정체성이 은폐된 존재를 도출해 냈다. 게임 속 플레이어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여 건네는 NPC로 은유 된다. 

작가는 2022년부터 그들을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였다. (2022~)시리즈는 가 열된 감열지**의 패턴 위로 노동하는 NPC가 드러난다. 화면 속 NPC는 휘발되는 종이 위로 점점 선명해지거나 희미해진다. 그들은 주로 지쳐있거나, 눈물을 흘리며 화면 밖의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 말풍선은 보는 이에게 가닿지 않는다. 2024년을 기준으로 NPC는 화면 안에서 노동이 아닌 다른 서사를 구축한다. 그들은 이 주하고, 변신하고, 좌절하며, 연대한다. 자본주의라는 커다란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는 시도들은 이동, 변신으로써 표현된다. 

<이주_불불불조심>(2024)은 불타는 지평선을 뒤로하고 가방을 들고 어딘가로 떠나는 두 NPC를 볼 수 있다.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지, 두 존재는 어떤 다짐을 하고 떠 나는 지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그 떠난 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기워 붙일 수 있는 것이 다. 불타는 지평선은 작가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그저 세계에 종말이 엄습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NPC를 억누르던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을 불 속으로 내던지고 떠나는 상황일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흔적 위로 돋아난>(2025), <흉터 위로 돋아난>(2025)은 갑작스럽게 등에 날개가 돋아난 사건을 그리고 있다. 날개는 마찬가지로 여러 작품에서 자주 등장 하는 기호로, 꿈과 일맥상통한 의미를 가진다. NPC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룬 꿈에 당혹스러워하기도 하며, 살을 찢고 돋아난 날개에 고통스러워한다. 

작가에게 밤은 노동하지 않는 삶의 조각이다. 그 시간 동안은 더 이상 어디에 종속되 지 않고 자유롭다. 이 전시에서 그림자는 언제든 대체가능한 노동들, 세계에서 터부시되 는 것들을 가리키는 화살표이다. 그리고 시간은 작가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축이다. 작가의 창작 행위에는 노동의 시간과 동일한 혹은 더 많은 시간이 투입되고, 단기 노동의 단위는 시간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임금은 어떠한 성과에 따른 가치 환 산이 아니라 최저임금제도에 기대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밤, 그림자, 시간》은 NPC 와의 동의어들의 집합이다. 

이예란의 화면은 보이는 것 이상의 환영이 없다. 단순하며 납작하다. 작가는 명확한 외 곽선, 말풍선, 반짝이는 효과, 컷 분할 등 만화의 요소를 빌려와 화면을 구성한다. 이는 가장 대중적이고 다가가기 쉬운 방식으로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그려내기 위함이다. 마셜 매클루언은 만화를 참여적 사유를 유도하는 일종의 쿨미디어로 규정하고, 스코트 맥클라우드는 그 규정을 이어받아 비어 있는 의미의 공백에 사람들은 자신을 투영하며 그것이 우리가 만화라는 매체에 몰입하는 이유라 설명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의미에 균열을 내고 관람자가 입장할 수 있는 길을 내어준다. 이처럼 분절된 이야기의 틈에 관 람자를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몰입을 유도하는 것이다. 또한 작가가 그리는 대안적 세계 에 관람자가 연관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루하다고 여겨졌던 가장 어둡게 빛 나는 각자의 노동 경험을 비춰볼 수 있다. 


글. 이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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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Player Character의 줄임말로, 주로 RPG게임에서 게임의 진행을 원활히 도와주는 존재로 플레이 어에게 퀘스트를 부여하기도 한다. 

** 감열지는 영수증의 용도로 널리 쓰이는 종이이며 뜨거운 열을 만나면 검게 색이 변하고 시간과 습도에 따라 쉽게 바랜다. 

***이용수, 카툰적 표현의 추상성과 몰입성에 관한 담론적 연구,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통권 제66호, 2022,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