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리 없는 것들의 시 

예란은 지난 개인전 ⟪미끄러운 길에서 자세를 낮추시오⟫(공간 파도, 2021.6.11.-6.22.)를 통해 자신의 노동 경험을 NPC에 빗댄 바 있다.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잘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들과의 일시적인 만남, 노동자에게 주어진 협소한 자리에서 수행했던 노동을 NPC의 임무에 비유해 표현했다. 그는 일련의 노동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자신의 몸을 독립적인 존재로 감각하는데, 역설적이게도 노동 현장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사가 뭉뚱그려지며 획일화되는 것을 느낀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회화에는 흰 천을 뒤집어 쓴 이름 없는 존재, 즉 NPC가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NPC 연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화의 기름과 만나 점차 색이 휘발하는 영수증 종이가 사용된다. 이는 사회에서 초단시간 노동, 플랫폼 노동 등 시간과 장소가 점차 쪼개지며 일회적인 노동 주체의 시간을 암시한다. 노동이 파편화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휘발되는 시간은 어떠한 소속감을 만들어내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노동 주체의 시간이 가벼운, 대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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